끼익. 열리는 문짝은 을씨년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방 안 가득 자욱한 어둠은 마치 서늘한 냉기처럼 피부로 스며들었다. 후지? 나직한 부름이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그곳ㅡ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건만 도심과 떨어진 외딴 산속의 별장은 이미 그 자체로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 후지, 나다. "

연이은 부름에 돌아오는 건 찾는 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툭, 두르르르. 무언가 발길에 차여 바닥을 구르는 소리. 그러다 이내 벽에 부딪혀 다시 멈춘. 공포감을 고조시키는 효과음을 따라 데즈카의 시선이 옮겨갔다. 어느새 어둠에 물든 눈동자가 천천히 그 물체를 읽어내렸다. 작은 원통형의 크기. 익숙했다. 라벨에 쓰인 글자. 선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충분했다.

졸피뎀(Zolpidem).


불면증을 앓거나 기타 정신질환으로 잠이 들지 못할 때 처방되는 약. 수면제, 혹은 수면유도제의 한 종류. 마약류에 속하는 향정신성 의약품.

소름이 전율했다ㅡ.

데즈카는 찢어버릴 기세로 커튼을 힘껏 젖혔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고 빛이 쏟아져 내렸다. 밀려난 어둠 사이로 소리 없는 공포의 정체가 드러났다. 축 늘어진 몸. 차갑게 언 얼굴. 구겨진 시트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몸뚱어리에선 호흡 한 가닥, 체온 한 점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 후지-!! "


찰싹, 찰싹. 후지의 뺨을 치는 손길에는 자비가 없었다. 신경질적이고, 광분했으며, 격정이 휘몰아쳤다. 후지-! 후지-! 익숙한 부름도 예외는 아니었다. 평소의 단정한 음성은 간데없고, 타버릴 듯한 노기로 매서웠다.

" 아파. "

짜증 같은 외마디 뒤로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천천히,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눈동자. 붉게 달아오르는 뺨에 대비되는 푸른빛. 그러나 잠에 취한 것인지 약에 취한 것인지 뿌옇게 흐린 상태였다.

" 후지, 너-! "

폐부를 찌르는 단말마. 데즈카는 이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ㅡ아. 긴 한숨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안도한 듯한, 그러나 아직 노기가 가시지 않은 눈동자를 아는지 모르는지, 후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 이게, 무슨 짓이야. 진짜 아프다고. "

마른하늘에 날벼락. 딱 그 말에 어울리는 낯빛이 후지의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랐다. 어눌한 말투만큼 느릿한 손길이 얼얼한 뺨을 오르내렸다.


" 졸피뎀.. "


" 뭐? "


" 수면제 말이다. 어떻게 된 거냐? "


" 수면, 제? "


안 그래도 구겨진 이맛살이 더욱 요동쳤다. 뜬금없이 웬 헛소리? 싶은 마음도 잠시. 후지는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했다. 수면제 약통 옆의 시체 한 구. 뭘 어떻게 오해했는지 안 봐도 훤했다.


" 안 먹었어. "


" 후지. "


" 안 먹었다니.... "


휙.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지의 얼굴이 사정없이 돌아갔다. 아파. 억센 손놀림에 후지가 불만을 토로했다.


" 후지ㅡ. "


하지만 깔끔한 무시. 강경하게 타는 눈동자는 묻는 말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후지의 얼굴엔 짜증과 체념이 한데 섞여 묻어나왔다.


" 나 불면증 있는 거 알잖아. 그래서 종종 처방받은 것도. "


" 좋아진 거 아니었냐? "


" .. 다시 처방받았어. "


순간 데즈카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일주일, 전에? 되묻는 음성이 딱딱하게 끊어졌다. 후지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정답일 것이다. 일주일 전. 데즈카가 서슴없이 지목한 그날이 후지에게 어떤 의미인지, 서로 너무도 잘 알기에.


" 걱정하지 마. 진짜 안 먹었어. 한 알도. "


" 후지. "


" 그냥 갖고만 있는 거야. 근데 넌 여기 어떻게 온 거야? "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후지가 말머리를 돌렸다. 먹먹한 가슴으로 데즈카와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후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 얼마나 못 잔 거냐? "


" 신경 쓸 거 없어. "


" 그럼 처음부터 신경 쓰지 않게 해야지, 어린애처럼 이게 무슨 짓이냐. "


" 지금부터라도 내버려두면 되잖아. "


후지는 데즈카의 손을 뿌리치고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후지. 부르지 마. 후지. 그냥 가. 계속된 부름과 거부가 실랑이며 교차했다. 귀찮았다. 듣고 싶지 않은 질문을 받는 것도, 묻는 말에 답해야 하는 것도. 지금 이 상황, 그의 존재, 모든 게 귀찮았다. 


ㅡ휘이익. 후지의 몸이 시트째 붕 떴다.


" 뭐 하는 거야?! "


" ..................... ”


" 데즈카, 지금 뭐 하는 거냐고-!. "


후지가 암만 성질을 부려도 데즈카에게선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그저 후지를 품에 안은 채 별장을 빠져나갈 뿐. 내려놔, 당장. 그만둬.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반응하지 않았다.


" 데즈카-! "


제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지듯 조수석에 착석하게 된 후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리게 타는 푸른빛이 데즈카를 쫓아가, 이내 운전석에 앉은 그를 노려보았다.


" 안전벨트. "


무심하게 던지는 한마디가 가관이었다. 출발할 테니 안전벨트를 매라. 분명히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차에서 내리면 그만일 터. 순순히 들어줄 후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데즈카가 한발 더 빨랐다. 철컥. 문이 잠겼다.


" 너-! "


예고도 없이 차가 출발했다. 후지의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오솔길을 달리는 내내 차가 굽이쳤다. 데즈카는 좀처럼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마치 스피드를 즐기듯 위험천만, 아슬아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전혀 그답지 않은 모습. 후지에겐, 너무 낯설었다. 그리고 무서웠다.


" 도착하려면 시간 걸린다. "


역시나 무심하게 툭 던지는 한마디. 후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는 정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 ... 잠이라도 자 두는 게 좋을 거다. "


이런 상황에서 잠을 어떻게 자라는 건지, 어찌 보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었다. 코웃음을 쳐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후지는 비웃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으니까 이제 눈 좀 붙여라. 


온전히 전해지는 숨은 말뜻을 '후지 슈스케'가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피를 나눈 가족보다, 사랑하는 연인보다 더 가깝다는 것이 결코 오롯한 축복만은 아니었다.


너, 진짜 잔인한 남자야. 날 소중히 여기면 여길수록 더. 그래서 난ㅡ.


오솔길의 끝자락, 스치는 풍경이 느리게 흘렀다. 자라. 말이 아닌 손이 후지의 눈을 덮었다. 싫어, 하지 마. 이성은 끊임없이 데즈카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데즈카 쿠니미츠'가 대상이라면 처음부터 부질없는 반항일 뿐. 마법 같은 이끌림에 스멀스멀 꿈의 향기가 피어올랐다. 스르르 감기는 눈동자는 인력(引力)이었다. 후지가 단잠에 빠져들기까지, 단 10초면 충분했다.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으므로,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ㅡ.



상사화(相思花) 지다










계절의 여왕 5월답게 따스한 햇볕 아래 꽃향기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주말을 즐기는 이들의 옷차림에도 이에 걸맞게 화사했다. 도심지에 만개한 봄, 조금쯤은 이른 여름을 연상케 하기도 했지만 물오른 봄임은 분명했다. 발걸음마저 가벼운 5월의 어느 주말 오후. 그러나 딱 한 사람, 유난히 눈에 띄는 미모지만 파리한 안색을 감출 수 없는 그녀는 걸음걸음 무거운 족쇄를 단 듯했다. 목적지까지는 불과 5분 남짓. 그 짧은 시간이 영원 같다고 느껴진다면 비약이 너무 심한 걸까. 하지만 그녀, 유코에게는 결코 비약이 아니었다.


『 만나자. 할 이야기가 있다. 』


줄곧 기다렸던 연인, 데즈카로부터의 연락.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분명히 기다리던 소식이건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 이미 예견하고 있던 일이 벌어졌음을 자각했다고나 할까. 절대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랐건만, 결국 예정대로 흘러가는 모양이었다. 신이 있다면, 정말 원망을 퍼붓고 싶은 순간이었다.


딸랑. 커피숍 문에 걸린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멀지 않은 테이블에 앉은 그가 아프도록 눈에 들어왔다. 융통성이 없을 만큼 오직 정도(正道)를 걷는 남자. 하나만을 바라보기에 오직 그 하나에 온전히 애정을 쏟는 남자. 데즈카는 그런 존재였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 머릿속에는 누구로 가득 차 있을까.


" 후지 상은.. 찾았어? "


" 아아. "


인사도 생략한 채, 밑도 끝도 없이 던진 그녀의 물음에 데즈카는 부정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담하게.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고 말았지만 이러한 반응이라니. 유코는 일말의 희망조차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에 참담해졌다.


" 찾았다니 다행이네. 하긴, 나를 두고 가버렸는데 찾아야지. "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만 하루 전, 불현듯 걸려온 한 통의 전화에 자신을 버려둔 채 가버렸던 그였다. 후지가 사라졌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그렇게 가버렸다. 사색이 된 얼굴, 잔상처럼 남은 뒷모습.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평생토록 가슴에 박혀있을 것이다.


" 어제는, 미안했다. "


" .. 미안? .. 미안했다, 고?! "


반문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언가 가슴을 꽉 누르는 먹먹함. 유코는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 후지 상은.. 괜찮은 거야? "


" 불면증 때문에, 잠 들지 못했던 것만 빼면. 지금 자는 중이다. "


불면증이 아니라 당신 때문이겠지ㅡ.


유코는 울음 같은 한마디를 삼켰다. 후지의 불면증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데즈카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그 마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데즈카와 함께하는 내내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친구라는 이름의 그들, 하지만 그 사이에 흐르는 유대감은 우정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다만 지금껏 두 사람의 관계가 정도를 넘지 않았던 건 데즈카의 마음이 후지의 마음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이 상대방의 마음을 인정하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을 허물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 또한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려 노력했고, 받아들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건 노력한다고,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과 초조, 질투심이 일어났다. 조금만 연락이 되지 않아도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 아닌지, 혼자서 별 상상을 다 했다. 데즈카가 자신을 사랑함을 알면서도, 그 사랑에 추호의 거짓이 없음을 잘 알면서도 엇나가는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랬다. 일주일 전,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하지만, 그게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정말 그게 이런 상황을 만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 그래서, 어디서? 어디서 자는 건데?


" ................................ "


" 그 불면증, 당신 아니면 못 고치잖아? 근데 지금 잔다며?? "


" ............................... "


데즈카는 내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들으나 마나 한 소리,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후지는 그의 집, 그의 침대에, 어쩌면 그의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을 것이다. 제 연인의 체취 속에 둘러싸여, 최소한 겉으로나마 아주 편하고 행복하게ㅡ.


당신, 참 지독하다. 잔인해.


ㅡ마음이,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유코는 자신이 마치 남편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여자처럼 느껴졌다.


" 그건 내 자리잖아-! 내가 있을 곳이잖아. 당신 어쩌면 이래?! "


" ... 미안,하다. "


" 미안하다고? 당신,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왜 자꾸 미안하다고만 하는 거야? 대체 왜?!! "


" 유코, 이제.. 그만두자. "


그는, 역시나 잔인한 남자였다. 어쩌면 이 타이밍에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오늘 이 만남이 저 말을 하고자 함임을 이미 알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니었다. 후지의 마음은, 그 생각은 그리도 손쉽게 읽어내면서도 자신의 마음은 어쩜 이리도 알지 못하는 건지. 제아무리 연인의 자리에 있다 한들, 그에게 사랑받는다 한들 결코 '후지 슈스케'를 넘어설 수 없다는 뼈아픈 진실 앞에 유코는 기어이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 내가.. 잘할게. 잘못한 거 있으면 고치고, 지금보다 더 잘할게. "


비굴한 매달림이었다. 애달픈 부름이었다. 그녀가 자존심을 지키기엔, 그를 정말 사랑했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 그런 게 아니란 걸 너도 알잖아. "


" 쿠니미츠, 당신 나 사랑하잖아. 아니야? "


" ............................  "


" 나랑 헤어지면, 분명히 괴롭고 아플 거잖아? 그러니까 제발 이러지 마. "


" ... 유코. "


한 번 터진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처연한 얼굴이 눈물에 얼룩져 더 아련하고 애달프게만 보였다. 데즈카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왜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왜 가슴이 찢기지 않을까. 사랑하는 연인이 저리도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는데, 자신을 붙잡는데, 어떻게 멀쩡할 수가 있겠는가. 오랫동안 아플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선택을 후회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하지만ㅡ.


" 그래.. 유코 널, 사랑한다. "


" ............................. "


" 네 말대로... 많이 아플 거다. 괴롭고 힘들 테지. "


" .. 쿠니미, 츠? "


희망을 싹 틔우는 발언에 유코가 반색했다. 어쩌면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제 손을 놓지 않을 거라는 기대감이 불현듯 그녀의 가슴에 자리했다. 당신 힘들 거야, 날 정말 사랑하니까. 당신, 그런 남자잖아. 유코가 슬며시 데즈카의 손을 잡았다. 고집스레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웃는 모습이 예쁘다는, 그 언젠가 그가 지나가듯 흘린 그 말대로. 그는, 데즈카는 외면하지 않았다. 묵묵히 그녀의 눈빛과 웃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서,


ㅡ그녀에게 잡힌 제 손을 빼냈다.


천천히, 느리게, 그러나 확고한 의지를 담아서ㅡ.


일순간 유코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무너질 듯한 날 선 위태로움.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숨이 멈춰버린 듯, 귀가 먹먹하고 눈앞이 깜깜했다.


" 사랑, 한다며? 아프고, 괴로울, 거라며? "


기계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딱딱했다. 거짓말처럼 멈춘 눈물이 차가웠다.


" 괴로울 거다. 힘들 거다. 하지만. "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살며시 감겼다가 떠진 눈동자가 유코를 향했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작은 흔들림 없이, 하나만을 담아내고 오직 그 하나만을 향하는 그 시선 그대로 오롯이 그녀를 직시했다.


" 너와 헤어지는 것보다 후지를 잃어버린다는 게, 더 괴롭다. "


유코를 사랑한다. 그녀의 얼굴, 말투, 몸짓, 웃음 하나까지도 사랑한다. 그녀를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마치 살아있음을 느끼듯 그렇게 뛴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필시 이런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할까. 어쩌면, 좋을까. 그녀를 아무리 사랑한들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음을.


" 내 사랑이 후지를 죽일까 봐, 그래서 녀석을 영원히 볼 수 없을까 봐, 무섭고 두렵다. "


이제야 알아버렸다. 어제, 자신의 오해 속에 빚어진 그 상황에. 영원히 감긴 줄 알았던 푸른 눈동자가 힘겹게 다시 드러나던 그 순간에. 신이시여ㅡ. 믿지도 않을뿐더러 믿을 생각도 없는, 그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입에 담은 적 없는 무형의 존재를 찾는 저 자신이 그곳에 있었음을.


" 사랑하잖아-! 나 사랑하잖아-!! "


고통에 찬 비명이 유코의 가슴을 헤집었다. 따갑게 와 닿는 주위 시선, 호기심에 동한 눈빛들이 그녀를 발가벗겼지만, 찢긴 가슴은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오로지 데즈카만을 향한 채, 제 연인이 제발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 뿐이었다.


" 그걸로는 안 되는 거야?! 난, 정말 안 돼?? "


데즈카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하기를 그리도 바랐건만. 이런 그녀를 외면한다는 건, 그녀를 버린다는 건, 생각보다 더욱 힘들었다. 두 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도망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차라리 천하의 둘도 없이 나쁜 놈이 되자. 어쩌면 그편이 그녀가 자신을 잊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내 사랑이 후지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래서 후지를 영원히 잃어야만 한다면,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꽃향기가 흐드러지게 핀 5월의 어느 날 오후.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연인.


ㅡ이별의 끝에 선 그와 그녀에게 남은 건, 낙인 같은 상처뿐이었다.





.

.

.

.






" ... 데즈카? "


죽은 듯 잠만 자던 후지가 가까스레 눈을 뜬 건, 잠든 지 이틀 째가 되는 한밤 중이었다.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뿌연 안개 속 눈동자가 그나마 푸른빛을 발한 순간은 저를 내려다보는 낮익은 누군가를 발견했을 때였다.


" 이제 깬 거냐? 정말, 죽은 듯이 잘도 자더군. "


농담 같은 핀잔에 걱정이 한껏 묻어나왔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이틀을 내리 잤으니 걱정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깨울까 말까, 몇 번이나 망설였을까. 하지만 불면증을 잊은 듯 달게 자는 후지를 깨울 수가 없었다. 지금껏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상처받고 찢긴 영혼이 제 곁에서만 편안해진다는 사실이 잠든 그를 바라보는 내내 제 마음을 아프게 했다.


" 여긴? "


" 내 오피스텔이다. 기억, 안 나는 거냐? "


아직 잠에 취한 듯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눈동자. 잔뜩 찌푸린 미간. 어쩐지 막 잠에서 깬 새끼 고양이의 갸릉거림을 닮은 그 모습 사이로 어눌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 .. 그거, 납치야. "


" 훗. 그럼 신고하든지. "


데즈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은 듯 후지가 뺨을 비볐다. 고양이 특유의 어리광.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오직 그에게만 허락된 특권이었다.


" 나 얼마나 잔 거야? "


" 이틀. "


" ..  후후. 이 모습 보고 나 불면증 있다고 하면 다들 웃겠다. 그치? "


헤헤거리는 웃음 사이로 하품이 연거푸 나왔다. 끔벅끔벅,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이틀을 내리 자고도 아직 충분하지 못했는지, 수면꽃이 다시금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데즈카, 나 졸려. 후지가 칭얼거렸다. 아아, 그래. 데즈카는 시트를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가지마, 가면 안 돼. 후지가 데즈카의 손을 꼭 잡았다. 새근새근, 순식간에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 아프지 마라. 이젠, 네 곁에만 있을 테니. "


ㅡ애잔한 시선이, 이미 잠겨버린 푸른 눈동자에 내려앉았다.


" 내 마음이, 네 마음과 같아질지... 네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나도 널 사랑하게 될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후지.... "




내 사랑이 후지에게 상처가 된다면,

그래서 후지를 영원히 잃어야만 한다면, 난 내 사랑을 포기할 거다.


내게 후지는, '후지 슈스케'는, 그런 존재다.




꽃향기가 흐드러지게 핀 5월의 어느 날 오후.

한 폭의 그림 같은 아름다운 연인.


ㅡ시작의 끝에 선 그와 '그'에게 남은 건, 깊이와 무게를 잴 수 없는 사랑뿐이었다.


by 아르튀르 | novel/short story |